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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시들지 않으면 조화다.

2011/09/19

어느덧 무지하게 길었던, 그리고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불볕더위와 긴 날을 지루하게 쏟아졌던 장마가 지나가고 아침 저녁 제법 쌀쌀한 기운이 대지를 감싸고 청명한 하늘이 가슴속을 듬뿍 적셔주는 가을이 왔다.

가을의 시작은 대한민국 어느 도로변에서도 만날 수 있는 가을의 제왕 코스모스에서 시작한다. 또한 가을의 끝자락도 코스모스의 사라짐과 함께 한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노래 가사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지난 7월, 8월의 강렬한 여름햇살의 한 가운데에서 단연 돋보였던 꽃은 배롱나무 꽃이다. 흔히들 백일홍나무라고 부른다. 원래는 백일홍나무였는데 배기롱나무로 했다가 배롱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진짜 백일홍은 멕시코 원산지의 귀화식물로 국화과의 일년초로써 ‘꽃이 100일 동안 붉게 피어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꽃이다. 배롱나무의 꽃도 ‘100일 동안 붉게 피어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실상은 꽃이 백일 동안 피어있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수많은 꽃봉오리가 시차를 달리해서 (거의 백일 동안) 계속 피고지고를 하고 있기에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는 걸로 착각하게 된다. 꽃이 시들더라도 비바람에 흩날릴 때가지는 끝까지 가지에 붙어 있는다. 조선시대 대학자 성삼문은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 서로 백일을 바라보니 너와 더불어 한 잔 하리라’라고 배롱나무 꽃을 찬미했다.

이즈음 작은 들풀 중에서 7월, 8월의 꽃의 여왕은 ‘닭의 장풀’이다. 흔히 ‘달개비’라고 불리는 이 꽃은 생명력이 매우 강해서 지독한 닭 똥 냄새와 분비물이 지천에 깔려 있는 닭장 옆에서도 잘 자란다 하여 ‘닭의 장풀’이라 이름 붙여졌다 한다. 꽃은 세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색은 천하제일이다. 정말로 맑디맑은 쪽빛 바다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혹 요즈음 9월의 청명한 가을하늘을 꼭 닮았다. 자세히 보노라면 정말 놀랍도록 하늘과 바다의 색깔을 담고 있다. 꼭 한번 찾아 보시라. 꽃잎이 시드는 것도 남다르다. 시들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꽃잎 끝자락부터 녹아 없어진다. 녹아 없어진다니 거짓말 같지 않는가. 여름의 끝자락은 닭의 장풀과 함께 사라졌노라고 감히 말해본다.

혹 꽃이 질 때 꽃잎이 하나하나 떨어져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꽃이 통으로 떨어져서 시드는 꽃을 기억 하는가. 대표적인 꽃은 겨울의 동백나무 꽃과 여름의 능소화이다. 이 둘은 꽃이 활짝 만개한 채로 그대로 땅에 떨어져서 시들어 간다. 화려하고 아름답던 시절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가지에 끝까지 매달린 채 시든 꽃이 되기 보다는, 화려한 빛깔의 꽃잎을 그대로 간직한 채 통째로 땅에 떨어져서 사라지는 아름다운 여인의 꽃이 동백꽃과 능소화이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수줍은 여인의 꽃이 있다. 너무나 흔해서 화려함, 아름다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우리나라 꽃 무궁화이다. 7월, 8월 여름의 한 켠에서 수수한 빛깔(사실은 굉장히 다양한 색의 꽃이 핀다.)의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길게는 9월, 10월에 까지 이른다. 가히 백일홍나무의 꽃과 비길만하다. 그래서 이름이 ‘다함이 없는 꽃’이라 해서 무궁화이다. 옛날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하면 머리에 어사화를 썼는데, 그 어사화가 무궁화였다. 우리나라 꽃 무궁화는 현재 최고의 꽃일진대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이 같은 현실을 무궁화 자신도 알아서일까. 무궁화 꽃이 질 때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진다. 해가 진 다음 저녁시간부터 해가 뜨기 전 새벽녘에 꽃잎을 닫은 채로 조용히 땅에 떨어진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동백꽃과 능소화와는 마음 씀씀이가 많이 다르다. 이제부터라도 무궁화 꽃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자.

이용준 한국녹색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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