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판매 독점을 풀어라

한국전력에서 가정용 전기 선택요금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이 한창일 때 나온 것이다. 누진제를 없애거나 단계를 크게 줄여야 한다는 요구가 거센 가운데 갑자기 튀어나왔으니 엉뚱한 제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전에서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누진제가 없어질 것을 대비해서 어떻게 손볼지 고심한 결과일 것이다.

한전에서는 누진제가 언젠가 폐기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누진제를 가능한 한 오래 끌고 가야 유리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선택요금제는 바로 이런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선택요금제 발표로 누진제 논란을 잠재우고, 디지털 시대에 다원화될 수밖에 없는 소비자들의 요구와 선택에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다.

피부로 느끼기는 어렵지만 세계 전력시장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전력 생산을 독점지배하던 거대 화력발전, 원자력발전은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중소형 발전에 조금씩 자리를 내주고 있다. 거대 전력회사의 전력 판매 독점도 많은 나라에서 이미 깨졌거나 깨져가는 중이다. 전기 생산과 소비에서 소비자의 선택폭은 크게 넓어졌다. 필요한 전기를 직접 생산해서 쓰는 것이 쉬워졌고, 이에 따라 전기독립이나 전기 부분독립을 실현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한국에서는 한전에서 전기 판매를 거의 모두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변화는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한전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한국에서는 이 변화를 상당히 오랫동안 지연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변화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발맞추는 것처럼 보여야 더 오래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선택요금제도 이러한 지연책의 하나이다. 지금 시험적으로 시행되는 프로슈머 제도라는 것도 다르지 않다. 그래도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전력시장의 큰 변화는 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진제에 대해서 요금의 형평이나 높고 낮음만 가지고 논의하는 것은 한전의 지연전략에 피동적으로 말려드는 게 된다.

누진제의 개편이나 선택요금제에 대한 논의는 변화하는 전력시장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변화의 핵심 방향은 독점에서 완전한 개방이다.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면 이 시장에서 누구나 전기를 팔 수 있고, 누구나 판매자를 선택할 수 있다. 요금도 자동적으로 선택이 되니 선택요금제가 불필요해진다.

한국에서는 전력시장 개방에 대해 말하면 한전 민영화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방과 민영화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개방이란 한전이 독점하고 있는 전력 생산과 판매 시장에 다른 사업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민영화는 한전을 다른 기업체에 매각하는 것이다. 개방과 민영화를 혼동하는 이유는 국민의 정부 시절 둘을 혼동하게 만드는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나는 민영화는 반대한다. 재벌이 거의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한국에서는 한전과 발전자회사들이 재벌에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력시장의 점진적인 개방에는 찬성한다. 개방하면 물론 재벌이 시장에 뛰어들어서 한전과 전기요금 경쟁을 벌일 것이다. 노조에서 우려하듯 처음에는 요금을 낮추어서 고객을 끌어들인 후에 점차 요금을 올려서 소비자를 골탕먹일지 모른다. 가능성 있는 예측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으면 그때는 소비자가 한전 같은 다른 판매자를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시장에 뛰어들어서 전기를 중개하고 판매할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전력망이 공정하게 관리되고 규제된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더 중요한 점은 아무리 전력시장 개방에 저항한다고 해도 시장은 개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가 되면 누진제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 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
2016년 8월 31일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