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일 장맛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날, 한국녹색회 회원들과 함께 강원도 철원군 동송에 위치한 평화전망대에 올랐다. 2층 전망대에 올라서자 바로 눈 앞에 비무장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이곳이 한국전쟁 당시 가장 전투가 치열했다던 철의 삼각지대(철원, 김화, 평강 지역)라고 한다. 60여 년이 지난 현재도 낙타고지, 백마고지 등에는 그때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일제시대 경원선이 지나가던 길목이었으며, 옛날 궁예의 태봉국 도성터가 있던 자리란다. 그런 저런 얘기들을 듣고 비무장지대 내 궁예 도성터를 바라보니, 남북 대치상황의 긴장감보다는 풀 한 포기, 한 줌의 흙으로 사라져간 궁예 도성의 흔적이 내리는 비와 함께 쓸쓸함과 애잔함을 더욱 느끼게 한다.

저 멀리 북쪽에는 높이 780m의 고암산이 보인다. 그 아래가 이곳 평화전망대에서 보이는 대부분의 비무장지대를 포함하고 있는 평강고원이 펼쳐져 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면 평지에 우뚝 솟아 있는 높이 947m의 금학산이 보인다. 학(철원의 철새 두루미라 해도 될 것이다)이 내려앉은 형상의 금학산 아래에는 정말로 넓디넓은 철원평야가 펼쳐져 있다. 풍수지리를 의존하지 않고서도 누구나 도읍지를 선택한다면 광활한 철원평야의 금학산 아래일 것이다.

그 옛날 도선국사는 궁예에게 "금학산을 진산으로 도읍을 정하면 국운이 300년에 이를 것이나 고암산을 도읍으로 고집하면 30년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진언했다. 그러나 궁예는 도선국사의 충고를 한낱 풍수쟁이의 언변 쯤으로 무시하고, 바로 이곳 고암산 아래 평강고원에서 옛 고구려 영토회복과 신라의 낡은 정치를 혁파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태봉국을 창건했었다. 아마도 한반도 남쪽 땅보다는 북쪽 땅에 무게를 실은 궁예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궁예가 고암산을 선택하자 금학산은 사흘 밤낮을 울었다고 한다. 금학산 나무들은 죽지 않았는데도 3년 동안 잎이 나지 않았고, 산에서 나는 취나물은 써서 먹지 못했다고도 한다. 금학산과 궁예에 얽힌 구전설화이다. 결국 도선국사의 예언대로 궁예는 나라를 세우고 26년 만에 몰락하고 만다.

강원도 철원과 경기도 포천의 경계에는 높이 923m의 명성산이 불쑥 솟아 있다. 그리고 이산 북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수계는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좁고 긴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는 한탄강과 합류한다. 한탄강은 ‘큰 여울 강’이라는 한자 뜻보다는, 왕건에게 쫓기어 피신하던 궁예가 이 강을 건너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는 전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명성산 또한 궁예가 부하들과 함께 이 산에서 왕건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절망적일 때, 망국의 슬픔을 통곡하자 산도 따라 울었다고 하여 울음산이 되었고 지금의 한자이름 명성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역사 교과서의 내용보다도 훨씬 살갑게 다가온다.

남북대치 상황의 긴장감과 자연생태의 보고 DMZ만을 생각하며 들린 비무장지대에서 전혀 뜻밖의 인물 궁예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이곳 철원은 흘러 지나간 역사의 흔적이 아니라 명백히 왕조의 수도가 존재했던 곳이다. 여전히 지금 현재 이곳 DMZ에는 궁예의 흔적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또한 우리가 반드시 DMZ를 보호해야 할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용준 한국녹색회 전문위원.